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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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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20년대 (jul 1, 1918 – jul 1, 1929)

Description:

Roaring 20s

미국이 1920년대에 누린 호황기. 제1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고 스페인 독감의 유행이 잦아든 후에 시작되었고 대공황으로 인해 끝났다.

배경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미국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했지만 그 과정에서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군사지원과 차관을 받은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로 유럽에 대한 종속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루이지애나 구입, 미국-멕시코 전쟁, 알래스카 조약 등으로 광대한 영토와 그곳에서의 자원을 확보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벨 에포크라는 전성기를 누리던 유럽을 추월하지는 못한 상태였으며, 미국인들 스스로도 아직은 경제, 문화적으로 유럽이 더 선진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미국인들의 인식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의 국력이 실질적으로 유럽을 앞서나가게 되면서 역전된다.

3. 사회상
3.1. 제2차 산업 혁명
1920년대 미국은 연 평균 경제성장률을 9% 이상 유지하며 호황을 누렸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초까지 진행된 제2차 산업 혁명의 성과들이 집약되어 1920년대가 되면 제조업을 위시로 한 산업들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혁신되었다. 이로 인해 공산품의 생산량과 생산효율이 크게 증대되었고 비약적으로 성장한 산업은 대규모의 고용을 창출하여 중산층을 크게 확대시켰다. 또한 경제호황으로 인한 전반적인 소득 증대와 금융의 발전으로 할부 구매 등 현대적인 소비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요인들이 겹쳐서 1920년대 인류의 대다수가 구경도 못해본 라디오를 비롯한 가전제품이나 자동차를 비롯한 신문물들이 당시의 미국에서는 본격적으로 대중화,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자동차 대중화는 컨베이어 벨트에 의한 조립 라인을 최초로 실용화하여 대량생산 체제를 구현해낸 포드 자동차 등 제조업의 혁신과 발전에 힘입은 바가 컸다. 특히 포드 모델 T는 광란의 20년대의 발전상을 상징하는 차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포드 모델 T의 전성기에는 24초당 1대가 제조되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생산량을 자랑했으며, 1927년까지 무려 15,007,033대가 판매되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1920년대 미국의 도로는 포드 모델 T로 채워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자동차 산업의 급격한 성장이 갖는 의미는 생각보다 크다. 자동차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철강, 유리, 고무 등 다양한 소재를 만드는데 필요한 기계와 전기 설비, 만들어진 자동차를 움직일 석유를 가공할 석유화학 공업, 그리고 자동차가 달려야 하는 도로와 다리 등을 만들 건설산업까지 말 그대로 근현대의 주요 핵심 산업들이 모두 자동차 산업과 얽혀 있다.

2차 산업혁명으로 각종 공학 기술도 크게 약진하였다. 공장 안에서 석탄, 석유 등을 태워 증기기관을 작동하는 기존 방식 대신 대규모 화력발전소, 전력망 등의 기반시설을 건설하고 전력으로 동력을 얻는 방식으로 전환되었으며, 라디오, TV 등 진공관을 이용한 전자제품들이 다수 등장하였다. 1920년대 동안 미국의 전력 생산은 4배 가까이 증가했다. 항공분야의 경우 1927년 찰스 린드버그가 미국 뉴욕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최초로 단독비행으로 대서양을 건너는 데 성공하면서 장거리 항공 운송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찰스 린드버그는 이후에도 미국의 민간상업항공산업과 항공운송산업의 기초를 닦는데 크게 공헌한다.

건축 분야에선 마천루 등 고층건물 건축의 노하우가 축적되기 시작하는데, 뉴욕에 세계최초로 300m 높이를 돌파한 318m의 크라이슬러 빌딩(1928년 9월 착공, 1930년 5월 완공) 건설이 이루어진 것도 1920년대였다. 참고로 1980년대 지어진 63빌딩이 249m, 2000년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타워팰리스가 263m이다. 심지어 아시아 전체로 봐도 홍콩의 중국은행 타워가 1985년 착공해서 1990년 완공되었을 때야 비로소 아시아 최초로 300m를 돌파하게 된다. 1920년대 당시에는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다른 모든 나라에는 300m는 고사하고 고층 빌딩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5]

민간 항공사들도 성행하였는데, 20년대엔 많은 민간 항공사들이 설립되어 국내선뿐만 아니라 캐나다, 중남미와의 노선을 운행했다. 특히 1925년에는 항공 우편법이 발효됨으로써 (기존 정부가 운영하던 항공우편을 민간 항공사에 맡김) 민간 항공사들의 성장을 부추겼다. 이후 1929년에는 '여객 및 화물의 항공운송에 관한 운송인의 책임' 등을 다루는 항공분야 최초의 국제협약인 바르샤바 조약이 체결될 정도로 항공업이 발전하게 된다.

3.2. 문화[편집]
미국인들에게는 여러모로 근대 미국의 절정기로 기억된다. 이 시대에는 미국 하면 떠오르는 아이콘들이 많이 나왔다.

최초의 방송매체인 라디오가 1가구당 1대 수준으로 보급되면서 미국인들은 대중음악, 연속극, 토크쇼, 스포츠 중계 같은 다양한 콘텐츠들을 집에서 즐길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대중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라디오 광고의 단가가 높아지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상업 라디오 방송국들은 청취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다양한 대중문화 컨텐츠에 투자했다. 바야흐로 현대적인 상업 대중문화와 매스미디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스포츠 경기의 중계가 대중화되며 상업적인 프로 스포츠도 크게 활성화됐다. 따라서 전국민적인 인기를 끄는 운동선수들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야구의 베이브 루스와 권투의 잭 뎀프시였다. 베이브 루스는 MLB의 레전드라는 의미를 넘어 미국 스포츠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잭 뎀프시는 엄청난 인기 덕택에 영화계에 진출해 여러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문화산업도 발전했다. 1920년대의 미국에서는 블루스, 재즈 등의 대중음악이 유행했다. 이 중에서도 재즈 음악은 대중문화의 태동 및 금주법의 시행에 따른 밀주산업의 활성화와 맞물려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재즈의 대표 아이콘인 루이 암스트롱도 1920년대 중반부터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재즈의 대중화 이후 베니 굿맨, 글렌 밀러 등의 백인 음악가들을 필두로 백인계층의 취향에 맞춰 변용된 스윙 재즈가 등장하고 빅 밴드 형식의 대형 재즈 밴드들이 나타나면서 재즈는 1920~1930년대의 문화를 상징하는 요소가 되었다. 할리우드도 세계 영화 산업의 메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찰리 채플린을 위시해 할리우드 무성영화가 1차 황금기를 맞았으며, 1927년에는 최초의 유성영화인 재즈 싱어가 개봉하면서 영화산업의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3.3. 사회[편집]
이 시기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은 꽤나 악명이 높아서"사회주의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발현할 것이다" 라고 많은 이들이 예견했으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국민정서나 기존 정당들의 간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실 이때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가 노동자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수준이라(…) 다른 나라에 비교해 보면 그렇게 나쁜 근무 환경도 아니었고 때에 맞춰 적절한 개선이 있어줬기 때문이다.

3.4. 정치[편집]
정치적으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로버트 라폴레트 등 주요 공화당 출신 진보 정치인들의 사망 혹은 몰락으로 20세기 초반을 수놓은 혁신주의가 시들해지고 '아메리카니즘'으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졌다. 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특수와 캘빈 쿨리지 정부의 시장방임주의 정책 등이 겹쳐 시장의 자유는 상당히 강화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금주법이 시행되고[10] 인종차별과 제노포비아도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24년 제정된 존슨-리드 법이라는 것으로 이 법은 이민자 수를 제한하는 쿼터를 더욱 축소시키고 아시아인의 이민을 금지했으며 쿼터 제한선 이상으로 들어온 이민자들은 추방하도록 규정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이 법을 좋아합니다 1920년대 제정된 이 존슨-리드 법은 무려 1952년까지 계속 시행된다. 반이민을 내세운 쿠 클럭스 클랜단 또한 절정기를 맞이해서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치며 흑인을 린치한 후 나무에 목을 매달아 놓는 일도 많았다. 좌익에 대한 공포는 사코와 반제티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KKK단의 활동 등 인종차별과 반공주의는 심해졌지만, 백인 기혼 여성에 한해서 페미니즘과 여성해방 운동이 활성화되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부족해진 남성들의 일자리를 보충해온 것을 계기로 여성들은 사회 참여의 동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마침 1920년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하는[11] 미국 수정헌법 제19조가 통과되면서 미국에서도 여성들의 지위와 권리가 대단히 높아진다. 이런 사회 분위기의 흐름을 타고 페미니스트들도 크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성 참정권 부여 이후 워런 G. 하딩은 미국역사상 최초로 여성의 투표를 받아 당선된 대통령이 되었다.

3.5. 금주법과 마피아[편집]
이권 다툼이 늘어나고 금주법의 시행으로 인해 불법적인 밀주 유통이 늘어나면서 뒷세계의 마피아 같은 범죄조직들도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는데, 이들은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 밀주 산업으로 떼돈을 벌었다. 그 유명한 알 카포네도 이 시기에 활동하던 인물로, 오늘날 여러 매체에서 묘사되는 페도라를 쓰고 시가를 피우며 톰슨 기관단총을 쏴 갈기는 전형적인 마피아의 이미지는 대부분 이 시기쯤부터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밀주유통의 중심지는 캐나다 인근에 위치한 프랑스령 생피에르 미클롱이였는데, 한창 때는 인구도 많이 없는 생피에르 미클롱의 항구가 세계최대의 주류 수입항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미국 정부가 항의를 해봤지만 총독이 "우리 섬 사람들이 술을 좋아해서 수입하는 것뿐임ㅋ"라며 발뺌을 하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4. 종말[편집]
이상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당대부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각했다. 생산의 자동화로 인해 실업 문제가 심화됐으며 실업으로 인해 소비인구가 줄어들자 기계화로 과잉된 생산량에 비해 유효수요가 크게 뒤쳐졌다. 그에비해 시장에 돈이 넘처나니 자연스럽게 투자와 투기가 판을치기 시작했으며, 공급이 과잉임에도 가격이 오르면서 시장에 거품이 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 정부는 방임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결국 1929년에 대공황이라는 끔찍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대공황이 터지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 GDP의 30~40%, 시가총액의 90% 가량이 증발해버렸다. 이렇게 휘청인 미국 경제는 뉴딜 정책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친 뒤에야 겨우 회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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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Ma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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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jul 1, 1918
jul 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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