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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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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un 1934 año - At 19, In 1947, Chung Ju Yung starts working at a rice company

Descripción:

At 19, In 1947, Chung Ju Yung starts working at a rice company called "복흥상회". Part of his job was delivering rice.

네 번째 가출. 고향 친구와 함께였다. 정주영은 무일푼이었으나 친구는 돈이 조금 있었다. 정주영은 친구에게 50원을 빌린 뒤 곧바로 인천으로 간다. 함께 있으면 친구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서였다.

정주영이 인천에서 새롭게 시작한 일은 부둣가에서 짐을 내리고 그 짐을 옮기는 일이었다. 하루 품삯은 고작 50전이었다. 먹고 자는데 드는 돈을 빼면 20전이 남았다. 정주영이 돈을 그나마 돈을 모은 뒤 가장 먼저 한 것은, 친구에게 빌린 돈 50전을 갚는 일이었다. 신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자는 합숙소는 밤마다 빈대가 들끓었다.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 나서도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정주영은 견디다 못해 식탁 위로 올라가 잠을 잤다. 하지만 빈대는 식탁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와 사정없이 몸을 물어뜯었다. 정주영은 머리를 짜내 식탁의 네 다리에 물을 담은 양재기를 하나씩 놓고 잠을 잤다. 곤히 잘 수 있었던 건 이틀에 불과했다. 이틀 뒤에 정주영은 다시 빈대에게 물어 뜯겼다. 불을 켜고 살펴보다 정주영은 기절할 만큼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빈대들이 벽을 타고 까맣게 천장으로 올라가 사람 몸을 향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주영은 빈대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 “빈대도 먹고 살기 위해 저렇게 노력하는데, 나는 뭔가? 나는 빈대만도 못한가? 그래, 빈대한테도 배울 건 배우자. 무슨 일이든 머리를 써서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을 거야.”

그 뒤 정주영은 인천 부둣가의 날품팔이 일을 그만두었다. “빈대도 살기 위해 도전하고 노력하는데, 나 역시 무엇이든 못하겠나. 그래, 경성으로 가자. 노동을 해도 경성이 더 나을 거다.”
그는 경성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로 한다. 정주영은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걸어서 경성으로 향했다.

물론 경성에서도 마땅한 일자리는 없었다. 며칠 동안 돌아다니다가 얻은 일자리는 안암동 고려대학교 신축 공사장에서 돌과 목재를 나르는 일이었다. 하루 품삯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막노동을 하면서도 정주영의 목표는 고정된 직장을 잡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시간이 나면 이곳저곳을 쏘다니면서 보다 나은 직장을 찾았다.

두 달 뒤 정주영은 원효로 용산역 근처 풍전엿공장(현 동양제과)에서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갔다. 엿공장에서 하루 50전을 받으면서 온갖 잔심부름에 파이를 연결하고 수리하는 일을 했다. 막노동에 비해 몸은 편해서 좋았지만 돈도 안 모아지고 기술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일 년 가까이 지낸 뒤, 정주영은 다시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았다.

그러다 신당동의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서 배달원을 구한다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하루 세끼 밥을 먹여주고, 가게에서 잠을 잘 수 있고, 월급으로 쌀을 한가마나 준다니…….”
쌀가게로 달려간 정주영이 취직하러 왔다고 하자 마음씨 좋아 보이는 주인은 이렇게 물었다.
“그래, 자전거를 탈 줄은 아나?”
“네. 잘 탑니다.” 사실 정주영은 자전거를 몇 번 타본 적은 있지만 자전거에 쌀을 배달할 정도는 아니었다.
“흠, 가랑이는 길구먼.”

그렇게 정주영은 자신이 바랐던 고정된 첫 직장을 잡았다.
정주영은 취직한 다음날부터 열심히 일했다. 누구보다도 일찍 첫새벽에 나가 가게 앞을 깨끗이 쓸고 물까지 뿌려놓는 것으로 하루 일을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쌀가마와 곡식 자루를 가지런하게 쌓고, 일이 끝난 뒤에는 안팎을 깨끗이 청소했다.

며칠 뒤 주인은 쌀 한 가마니와 판 한 되를 왕십리 자신의 집으로 배달하라고 했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정주영은 무턱대고 쌀가마니와 팥 자루를 매고 비틀비틀 나섰다, 기어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쌀가마니와 팥 자루가 진흙탕에 떨어져 엉망이 되어 버렸다. 자전거 핸들도 확 휘어 있었다.
정주영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지만, 아프다는 느낌보다 걱정이 앞섰다.
“자전거를 못 탄다고 주인이 그만 두라고 하면 어떡하지……. 당장 나가라고 할지도 몰라…….”
그런데 주인아주머니는 정주영을 보더니 큰 소리로 웃으며 “비 오는데 수고했다”며 오히려 격려해 주었다.
정주영은 그날 밤부터 내리 사흘 동안 밤잠도 안자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워 배달 연습을 했다. 그 뒤 얼마 안가 한꺼번에 쌀 두 가마를 싣고도 제비처럼 날쌘 최고의 배달꾼이 됐다.

정주영은 아버지가 농사일 하듯 그야말로 전심전력을 다했다. 아버지와 함께 한 농사일에 비하면 쌀가게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정주영은 장부정리까지 도맡아 했다. 주인은 마음이 너그러웠고 돈은 많았지만 배움은 부족했다. 그래서 장부에는 어디에서 쌀을 얼마만큼 들여왔고, 누구한테 배달했는지, 돈은 언제 받았는지 같은 것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세 번째 가출 때 잠시나마부기를 배운 적이 있던 정주영은 깨끗하게 장부를 정리해 놓았다. 6개월쯤 지났을 때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제치고 정주영에게 장부 정리를 맡길 정도였다.

정주영은 가출 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첫 편지를 썼다. 집을 나온 지 3년쯤 지나 1년 월급이 쌀 20가마가 됐을 때였다. 아버지는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네가 출세를 하기는 한 모양이구나. 이처럼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쌀 한가마로 시작한 월급은 두가마가 되고 나중에는 세가마니까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주인은 정주영을 불렀다.
“아무래도 가게를 내놓아야 할 것 같네.”
정주영은 주인의 말을 드는 순간, 힘이 쑥 빠진 것 같았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이만한 월급을 주는 곳도 없는데……. “
주인은 말을 이었다.
“아들놈 때문이야. 가게를 계속해 봐야 아들놈 노름 돈이나 대주는 꼴이니…….”
주인에게는 게으른 난봉꾼 아들이 있었다. 만주까지 들락거리며 가산을 탕진하는 아들 때문에 주인은 울화병이 들어 사업을 계속할 의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네가 이 가게를 인수하게나.”
“주인어른, 하지만…….”
“아닐세. 자넨 성실하니까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해. 단골들은 그대로 물려받고, 정미소에서도 쌀값은 월말에 한꺼번에 계산해 주기로 약속을 받았어. 돈은 자네가 저금해 놓은 것으로 먼저 주게나. 나머지는 벌어서 갚아도 좋아.”

그 당시 복흥상회 주인집 딸이었던 이문순 씨는 경기여고를 나와 경성사범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정주영은 다른 배달꾼과 달랐다. “저녁때가 되면 다른 일꾼들은 장기나 두고 담배를 피우고 노는데 비해 그 분은 항상 책을 보고 있었죠.”
정주영이 보던 책은 펄벅의 <대지>, 심훈의 <상록수>, 이광수의 <흙>이었다.
이씨는 자신의 어머니한테서 정주영이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면서 주경야독하던 성실한 청년이었다”고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정주영은 쌀가게 배달원에서 주인이 되었다. 1938년 1월 정주영은 ‘경일상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경일(京一)’은 경성에서 제일이라는 뜻이다.
정주영은 단골손님을 더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그 덕분으로 배화여고와 서울여상 기숙사에도 쌀을 댈 수 있었고, 가게도 부쩍부쩍 발전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잘 나가던 쌀가게를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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